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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강학회19

고난의 주체가 희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 인류는 신분제 사회를 당연시 하고 살았다. 당연히 태어나며 정해진 신분이 그의 삶 전체를 지배했다. 양반이나 귀족으로 태어나면 그의 삶은 큰 노력 없이 많은 것을 누리며 살 것이고, 노예나 노비로 태어난다면 그의 행실과 무관하게 그는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다. 그리고 노력을 한다 해도 그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 조직의 부조리를 온 몸으로 당하며 살아온 이들은 바로 그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다. 구한말 사회적 무시 속에 살았던 기생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 부조리한 운명에 대하여 고민하여 스스로 새로운 대안을 궁리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유학을 떠나려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사상을 일구어가며 부조리를 일상이 아닌 나쁜 것으로 여기는 세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2019. 11. 8.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난했다.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대단하지 않았다. 기적의 능력을 가졌다지만, 가난하고 아픈 이를 위한 치유의 기적을 행할 뿐,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잔혹한 죽음의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부유함과 권력을 얻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 지배하는 권세의 기적보다 낮은 곳의 아픔을 안아주는 치유의 기적을 보였다. 예수는 많이 배우지 않았다. 명문 학교를 나온 이도 아니다. 그리스나 로마로 유학을 다녀온 수재도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공간에서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도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벗으로 있을 뿐이었다. 지상에.. 2019. 9. 26.
종교는 마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보아라! 이 현실을! 종교는 마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보아라! 이 현실을!: 중세 유럽의 아픔을 통해 본 참된 신앙과 신비란? 그럴 때가 있다. 차라리 모든 것이 거짓이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다. 보이는 것은 눈물이며, 느껴지는 것은 슬픔뿐일 때가 있다. 그때 삶은 그냥 아픔이다. 몸의 아픔은 약으로 치유되지만, 마음의 아픔은 약도 없다. 그땐 모든 것이 거짓이면 좋겠다 싶다. 차라리 보이는 모든 것이 가짜이면 좋겠다 싶다. 그럴 때가 있다. 나도 그랬다. 2009년이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님께서 두 다리를 수술하셨다. 성공적인 수술이 끝나고 멀지 않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두개골 골절, 얼굴 안면 골절, 발목 골절 등으로 1년 동안 7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했다. 치료가 거의 끝날 무렵, 아버지께서 암 .. 2019.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