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캄연구소394 '스콜라철학은 왜?' 중세 스콜라 철학 강의 1 (2020.03.17)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중세 스콜라 철학 강의' 1강 왜 ‘스콜라 철학’을 하는가? 스콜라철학은 흔히 가톨릭교회의 신학자 혹은 가톨릭교회를 옹호하는 전문철학자들의 것이라 하여, 한 동안 철학계(哲學界)에서도 제법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질송의 중세철학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무신론자 혹은 가톨릭교회, 크게는 그리스도교회 밖에선 도대체 무슨 뜻을 가지고 다가오는지 혹은 있는지 의문을 가진 이들이 많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신 존재 증명이라 것도 신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들에겐 흥미로운 논리 싸움이나 배부른 신앙인의 사치스러운 언어유희 그 이상 어떤 의미도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스콜라철학은 흔히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라고 부르기.. 2020. 3. 17. 이 절망의 터에서 희망을 본다. <대한민국철학사> 읽기 1 "고난은 죽으라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존재론적으로 재난이 아니다. 스스로의 생명을 더욱 더 단단하고 아름답게 하는 시간이다. 사람이 스스로 종이 되어, 보이는 주인이거나 보이지 않는 주인이거나 주인을 가정해 고개를 숙이고, 그것이 운명이라며 살아가는 것은 없는 원인에 고개 숙인 결과다. 스스로 자기 원인이며, 스스로 자기 결과인 사람에게 그런 종살이, 그런 숙명론은 가장 큰 병이다." ( 404쪽) 고난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고난의 시간이 분명합니다. 오늘 새벽 저는 스페인의 한 신부님께서 자신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으며, 자신으로 인하여 성당은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출입이 통제된다면서 집에서 신앙 생활을 부탁한다는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바이러스로 하느님의 품에 안긴 신부.. 2020. 3. 16. 지금 여기는 '절망의 터'가 아니라, 내 '희망의 터'다. (<대한민국철학사> 한줄 읽기) 함석헌 철학의 시작은 ‘지금 여기의 긍정’이다. 삶의 긍정이고 역사의 긍정이다. 바로 여기 무엇인가 끝없이 부족한 결핍의 공간에 대한 긍정이다. 함석헌은 외적 초월이 결국은 민중을 무시하는 데로 이어질 것임을 알았다. 359쪽 지금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항상 더 많은 것을 보면서 무엇이 더 없는지 지적 당하는 삶을 살았다. 과거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을 해결해야하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버려졌습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항상 누군가의 입만 보고 살았다. 지적 하는 입, 너는 이렇게 부족하다는 입, 너는 온통 부족하다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모역하는 입, 그 입만 보고 살았다. 그 입에서 나온 것을 답이라 생각하면 삶은 조금 편했다. 그래서 그 입이 답이 .. 2020. 3. 14. '너의 아픔'은 '우리 있음의 터'다. '만남의 터'다. (대한민국철학사 한 줄 읽기) 철학의 자리는 고난의 자리다. 철학은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자기 무시’ 가 민중을 침묵하게 하는 힘이 있다면, 철학은 자기 소리를 내게 한다. 368쪽 사악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마스크가 아니라, 방탄조끼를 입고 무장을 하며 살아도 불안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무시와 조롱을 받았지만 또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한 고마움 또한 너무나 많았다. 나란 존재는 어쩌면 그 고마움의 순간이란 조각들이 이른 그 무엇일지 모른다. 나의 존재 자체가 이미 너를 불러 있고 우리 속에서 있을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이란 말이다. 그러나 사악한 이들도 있다. 이 와중에도 돈 욕심에 타인의 불안이나 아픔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이 불안을 무지하고 무식한 이의 어리석음 정도.. 2020. 3. 14. 이전 1 ··· 65 66 67 68 69 70 71 ··· 9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