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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픔과 더불어 나아가는 신앙...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국가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183항) 나를 그저 홀로 있는 나로 마주하는 신앙은 우리 가운데 타자의 아픔에 무감각해지고 그 아.. 2019. 12. 14.
혼이 녹아든 기도와 같은 삶... 우리는 하나되어 주님에게 나아갈 것이다. 말로 하는 기도는 참으로 흔하고 흔하다. 많이들 한다. 여기 저기에서 참 많이 한다. 주님의 기도는 가톨릭교회에서도 많은 개신교회에서도 동방정교회와 성공회에서도 하느님을 향하여 올려진다. 말로는 참으로 흔하게 하는 기도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삶은 그렇게 살고 있을까? 그 기도가 말에서 그치지 않고 혼에 녹아든 기도라면, 그 기도의 내용은 삶이 되어야 한다. 치쁘리아누스는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 그 기도는 우리 신앙의 토대이고 기둥들이고 영양분들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 우리의 삶이 오롯이 살아지는 따스한 집이 우리의 신앙이라면, 그 신앙이라는 집이 세워질 흔들리지 않는 토대, 그리고 단단하게 올려져 비바람을 막아줄 지붕과 벽이 기댈 단단한 기둥들이 필요하다. 또 이런 저런 이기적인 욕심으로 부터 .. 2019. 12. 14.
나도 모를 아픔 앞에서... 요즘...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죽음을 전해듣는다. 벗의 아버지... 아내의 고모... 또 벗의 아버지... 벗의 남편... 그 많은 이별의 아픔이 지나간다. 처음엔 그저 일상 속 작은 슬픔이었다. 그러나 이제보니 작은 슬픔이 아니라 참고 있던거다. 난 그 순간 아팠고 때론 깊이 깊이 아팠지만 그냥 넘기고 넘겼다. 글노동한다고 집안일한다고 이런저런 주변일들 해결한다고... 오늘 길거리 말라죽은 식물을 마주하는데... 이후 갑자기 너무 슬프다. 정말 한없이 슬프다. 그래도 나는 강의 준비를 해야하고 강의를 가야하고 또 강의를 한다. 준비한 10개 중 예상하지 못한 내용과 무관한 어느 질문에 조금 흩어지더니 5개는 풀지 못했다. 더 우울해졌다.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잔을 한다. 아내는 무슨 일인지 묻는다... 2019. 12. 14.
아픔 철학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다. 인간이 경험한 고통의 숫자만큼이나 철학의 고민도 다양했다. 우리 사회에 철학 무용론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철학이 더 이상 우리의 고통에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철학이 철학으로 있는 그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포기해 버려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철학은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 유대칠 2019.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