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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174

'초월'이란? 하느님은 누군가의 하느님으로만 계시지 않는다. 그들만이 하느님을 독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들만 하느님을 독점한다면서 자신들과 다른 모든 이들을 악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하느님 이름으로 우리를 분열시키고 그 가운데 몇몇은 바로 그러한 분열됨을 이용해 권력과 부유함을 누리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분열의 주인공들이 대체로 악마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자신의 이기심을 종교의 언어로 화장한 사악한 악마 말이다. 그런데 그 악마를 천사인듯 옹호한 것도 교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답답한 일이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자기 도피처로 숨는 것도 분열이다. 결국 우리의 일이다. 같이 분노해야한다. 도려낼 것은 도려내야 한다. 나에게 '초월'이란 '벗어남'이다. 지금 '나'와 '우리편'이란 아집.. 2020. 8. 22.
주체와 주체의 만남 주체와 대상의 대립은 주체가 대상을 이해하는 조건이 된다. 나라는 주체가 남이란 대상과 마주할 때 나는 남을 인식하고 편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대림은 흔히 주체 중심으로 대상을 배제하게 한다. 그러나 나라는 주체와 더불어 있는 대상은 항상 주체를 구성하는 조각을 만들어왔다. 즉 나는 수많은 너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더불어 있음의 터이다. 그리고 이 터는 점점 생동적으로 역동하고 있다. 만남의 더해짐은 존재의 풍성함으로 이어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주체가 이와 같이 역동적이듯이 나 아닌 나, 즉 대상 역시 자신의 편에선 주체이며, 그 주체 역시 역동적으로 있음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나와 너의 만남은 역동적인 두 존재의 더불어 있음의 마주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역동성의 역동들.. 2020. 8. 21.
이응노의 풍경 1950 이응노의 1950년 작품 '풍경'이다. 풍경을 본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 사실을 본다는 것이다. 사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은 철학사를 객관적 사실이라 보았다. 철학사의 주체가 가진 시선이 객관적이라 믿었다. 아니 그 정도의 고민도 없이 그냥 그것을 객관적 사실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 풍경이 주관적 사실이듯이 철학사 역시 주관적 사실이다. 주관적 사실이란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순간이 때론 그 크게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저런 것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그려진 풍경화는 추상화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추상은 주관의 자신감이다. 내가 나오 있을 때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것을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 사물의 모습들이 살짝 보인다. 그러.. 2020. 8. 9.
서로 다른 몸짓이 우리를 이루고 있다. (2020 07 28) 누가 주인공인가? 보는 이들은 저마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바로 옆의 한 몸짓과 완전히 떨어진 분리된 홀로 있음으로 주인공인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이게 주인공이구나 싶어 보면 그가 주인공이기 위해 옆의 몸짓이 필요하다. 홀로 주인공이 아닌 기대어 있는 주인공이다. 기대인 주인공은 제대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린 대부분 기대어 있다. 온전히 홀로 행복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살아가지만 못한다. 아무도 업는 곳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해도 결국 그를 품고 안아주는 곳은 그를 우리라 부르는 옆의 사람이다. 너를 죽이고 혹은 너의 아픔에 고개 돌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워도 그냥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부끄러움이란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2020.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