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캄연구소394 있어야 할 곳에 둡시다. (더불어 신학과 복음 읽기1)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지 마시오. 거기서는 좀과 벌레가 갉아먹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갑니다. ( 6장 19절) 이후 예수께서는 이어서 어찌 살아야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제가 묵상한 바로 이 구절입니다. 이 부분은 대체로 흔히 Q문헌, 즉 예수 어록이라 불리는 곳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직접 전한 말씀이 분명하다는 것이겠지요. 암브로시오의 에서 암브로시오는 이 세상에 쌓은 재물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는지 화를 내며 전해줍니다. 그 분노는 근거 없는 분노가 아닙니다. 바로 이 구절, 예수의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한 분노입니다. '공유'라는 말이 유행하며 영어 common에 대한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라틴어 commūnis에서 .. 2020. 11. 20. 전태일을 부른다는 것 (전태일과 함석헌 그리고 문익환) "그 참한 혼을 살려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전태일을 추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그에게 추도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불사른 사람에게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그보다도 차라리 우리가 그를 살려내야 한다고 하고 싶다. 전태일을 살려라. 그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 우리가 그를 차마 죽은 채로 둘 수가 없다. 아니다. 전태일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다. 그는 그 죽음으로 우리 앞에 삶을 절규하고 있다. 그런 그를 어찌 차마 죽음 속에 묻어두고 썩혀둘 수가 있느냐? 전태일을 살려야 한다. 왜 우리는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되나? 첫째, 그는 이 썩어지고 악독한 사회에서 참 드물게 보는 아까운 심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 2020. 11. 18. 결국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학으로 신학을 생각하며...)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요한 4장 8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장 19절) 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합니다. 신은 어떤 존재이고 그 신을 향한 우리의 구원은 어떠한 것인지 참으로 길고 긴 시간 참으로 다양한 논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가지고 서로 다투고 어느 순간엔 서로를 이단이라며 비난하며 그렇게 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토대로 서로 다툽니다. 그런데 막상 속 그 신은 사랑이라 참으로 간단하게 정의되어 나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항상 사랑하고 있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던 그때에서 그분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2020. 11. 18. 십자가의 예수는 여전히 외로울지 모릅니다. 예수가 죽던 날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은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를 바로 세우는 장면입니다. 어둠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숨어 있으며 빛은 예수를 향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발, 못 박힌 그 발 부근, 그 시대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매우 슬픈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베레모를 쓴 그 사람은 바로 이 그림의 화가 램브란트입니다. 그는 슬픈 얼굴로 이 비극의 장면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과거로 돌아가 그 장면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예수의 십자가, 그 고난의 모습이 현실로 항상 그에게 머물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겠습니다. 위안부 할머니에게 과거의 그 아픔은 단순히 과거의 한 아픔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로 진행되는 아픔입니다. 육체의 아픔과 달리 영혼의 .. 2020. 11. 17. 이전 1 ··· 42 43 44 45 46 47 48 ··· 9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