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캄연구소394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천주 예수께서 한 번 작은 괴로움만 받으셔도, 온 세상의 죄를 다 넉넉히 푸실 것인데, 어찌 만고만난(萬苦萬難)을 다 받으시어 죽기까지 하셨습니까?”말하기에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천주께서 죽으신 뜻은 지극히 선하시니, 대개 천주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무궁무진하기에 다시 더할 것이 없게 하려 하심입니다. 또 천주께서 지극히 높으심과 사람의 죄가 지극히 중함을 보이고자 하심입니다. 또 당신이 이미 사람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사람도 천주를 위하여 죽기를 사양치 말라 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또 사람이 한 가지 죄만 있을 것 같으면, 당신이 한 가지 괴로움만 받으셔도 충분하련마는,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아니한 곳이 없기에, 예수께서 거룩하신 몸에 고난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던 것입.. 2019. 12. 20. 희망의 기도 희망은 멈춘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믿습니다. 희망은 생명이며 살아 나아가는 순간순간 내안에 더 크게 이루어지는 우리 하느님의 나라라 믿습니다. 하느님, 하느님의 뜻으로 나를 부수어 당신의 뜻과 같게 하소서. 저는 그것 하나 부여잡고 이 길 가려합니다.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을 길이라 더 편한 마음으로 이 길 갑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19. 12. 19. 쿠사누스의 행복해지는 법, 불행해지는 법 쿠사누스의 행복해지는 법, 불행해지는 법 누구도 불행하고 싶지 않다. 불행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항상 어떤 식이든 행복을 추구한다. 그 행복의 모습이 저마다 다른 모양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삶의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누군가 목숨을 걸고 정의를 위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비록 그 삶의 모습이 남들의 눈엔 고통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의 삶에선 행복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일 것이다. 누구도 불행을 추구하진 않는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행복의 모양은 참으로 다양하다. 누군가는 많은 불편에도 불구하고 봉사의 삶을 살아가며 행복을 느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쉬울 게 없는 멀쩡한 의사인데도, 굳이 전쟁터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치료하는데서 행복감을 느낀다. 참으로 다양하다.. 2019. 12. 19. 철학, 철학사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 철학 공부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많은 경우 철학사를 열심히 공부한다. 철학사를 만드는 사람들도 결국 이미 있는 철학사의 사관도 그리 다르지 않은 입장에서 철학사를 적어간다. 그냥 이미 있는 생각의 한국어 버전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왜일까? 박동환의 에 상식 같은 이야기가 있다. 철학사를 읽는다고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맞는 말이다. 철학사를 읽는 것은 그냥 철학사를 쓴 이의 사관에 의하여 쓰인 하나의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다. 그것이 생산의 행위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생산을 철학이라 부르기는 힘들다. 철학은 철학사를 쓰는 행위다. 읽는 행위가 아니다. 쓴다는 것을 질송이나 들뢰즈 혹은 플라쉬와 같은 이들의 철학사를 한국 버전으로 만들어낸다는 말이 아니다. 질송은 자신의 신념 속에서 철학사를.. 2019. 12. 19. 이전 1 ··· 78 79 80 81 82 83 84 ··· 9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