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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연구소394

아픔 철학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다. 인간이 경험한 고통의 숫자만큼이나 철학의 고민도 다양했다. 우리 사회에 철학 무용론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철학이 더 이상 우리의 고통에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철학이 철학으로 있는 그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포기해 버려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철학은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 유대칠 2019. 12. 12.
더불어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성전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할 때, 치쁘리아누스(Cyprisnus, 200/210?-258)는 converso(꼰베르쏘)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동사는 그냥 '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아닙니다. 같이 더불어 산다는 의미입니다. '벗'으로 더불어 살고 '부부'로 더불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홀로 가다가 더불어 돌아와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치쁘리아누스는 하느님의 성전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 할 때, 그냥 '홀로 살다'가 아닌 '더불어 살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느님은 단지 나만의 '나'의 하느님이 오직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리 모두의 하느님, 하나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원래 모습이라 치쁘리아누스는 말합니.. 2019. 12. 10.
나만 아프다... "다만 그의 몸은 자기의 아픔만을 느끼고 그의 영은 자신만을 애통해합니다." 욥기14장22절 그 많은 고마움은 보이지않고 그저 나만 아프다 생각한다. 그 아픔에만 집중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앞에 당장 누구 찾아와 죽음의 고통을 당하지만 보이지않는다. 결국 나도 그도 모두 홀로 외로운 신앙을 이어간다. 경우에따라서 이기적인 신앙이 되기도 한다. 우리로 함께 있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기도 한다. 각자 각자 그렇게 저마다 자기 아픔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한다. 눈을 떠 내 앞 아픔에 다가가자. 다른 이유없다. 그냥 더불어 안아주자. 그가 홀로 아프지 않게 우리됨을 보여주자. 그때, 나도 이 홀로된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곳에 하느님 역시 더불어 있으시리라 믿는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 2019. 12. 9.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 고난당하시는 것이 진정 필요했겠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전하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 고난당하시는 것이 진정 필요했겠습니까? 네, 꼭 필요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첫째, 우리의 죄를 기워 갚는 치료제로서 둘째, 우리 행위의 모범으로 필요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Collatio 6 super "Credo in Deum") 나는 이리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그 힘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바로 여기 우리를 위해 그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랑해서 입니다. 사랑하니 그를 위하여 그 힘든 고난을 기꺼이 받아신 것입니다. 아니 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스스로 결단하시고 우리 아픔을 품으신 분이 바.. 2019. 1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