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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연구소394

<형이상학> 읽기 1 유대칠의 바로 그 고전 - 형이상학 읽기 1 "모든 사람은 자연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그 증거로 사람은 감각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것의 쓸모를 떠나 감각 그 자체를 즐기며 그 가운데 다른 어떤 감각 보다 시각을 즐긴다. 실천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보는 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좋아한다. 그 까닭은 모든 다른 감각 가운데 우리는 시각을 통하여 가장 많이 알게 되며 사물들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980a21-27)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말이다. 사람은 원래 알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욕구란 말이다. 물론 성욕도 있고 식욕도 있다. 이것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이 이런 저런 길고 .. 2019. 10. 31.
중세의 철학과 지금의 나 2019년 10월 29일 - 왜 하필 성자인가? 중세 사람들은 이유가 참 궁금했다. 삼위일체라면 동일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있다면 왜 굳이 성자의 육화를 통하여 성자에 의하여 구원 사업이 이루어진 것일까? 오세르의 윌리엄은 에서 이 문제를 묻는다. 왜일까? 윌리엄은 요한 복음서를 보라 한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성자로 인하여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 그를 통하지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요한 복음서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이 문제와 무슨 소용인가? 생각해 보자. 성자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창조 이후 재창조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선 처음과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처음 창조가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재창조에서도 모든 이들은 성자를 통하여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윌리엄의.. 2019. 10. 29.
더불어있다는 것의 의미 철학은 뒤에 서 있다. 앞에 있지 않다. 나란 있음의 주체도 치열한 생각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주체만이 자기 철학을 가진다면 철학은 삶의 뒤에 찾아온다. 돌아보면 그때서야 망각 속에 있던 그 주체를 깨우치듯, 그리고 그 깨우침에서 철학이 오듯이, 철학은 분명 삶의 뒤에 온다. 그 돌아봄으로 알아야할 참됨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든지 아니면 살아가면 일구어가는 후천적인 것이든지 그 참됨을 향할 그 주체는 바로 여기 나다. 자연과학이 아무리 앞서가도 그 참됨을 향하는 길의 얼마나 다양하더라도 그 주체는 나다. 그런데 그 주체란 것이 그리 보면 바로 '나'인데. 그 나란 있음의 무엇임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나란 존재의 무엇임은 나와 더불어 사는 너와의 만남에서 일구어지고 자라.. 2019. 10. 25.
유대칠의 철학사 이야기 1 젠장. 방금까지 제법 길게 적은 글이 날아갔다. 이것도 나의 잘못이다. 다시 적어본다. 돌대가리로 살기 힘들다.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가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배자가 등장했다. 작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갈 때는 가족 단위일 수 있지만, 이젠 그 정도의 작은 단위가 아닌 남들과 같이 살아가는 곳에선 어쩔 수 없이 법이 필요하고, 그 법을 유지할 권력이 필요했다. 당연히 지배자가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지배자는 처음엔 그저 힘이 쎈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힘만으로 자기 ‘권력’의 ‘권위’를 정당화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천명’, 즉 하늘의 뜻에 따라서 지배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물.. 2019.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