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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2호실30

결국 나와 너의 평등한 관계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이 힘겨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2020년 더불어 마주 보기 힘들지만 사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꼭 물리적으로 같은 자리에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멕시코에 사는 저의 친구는 멕시코 사람이고 멕시코에 살고 있으며 한국에 온 적도 없지만 저와 더불어 있습니다. 힘든 시기 저의 든든한 응원이 되어 주었습니다. 더불어 살기 힘든 세상이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힘겨워하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과거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란 말이 이런저런 철학적 설명 없이 그냥 그 말의 문법적 뜻으로 다가오는 세상입니다. 더불어 살아감의 소중함보다는 다투고 싸우고 자신과 조금만이라도 다르면 더불어 있지 않은 그러한 삶에 더 익숙해져 버린 그런 세.. 2020. 11. 25.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없다. 환경을 생각하는 여러 신학적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교황은 2019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20회 국제형법학회(AIDP) 총회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일종의 죄로 규정할 필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자연 파괴를 그를 생태 학살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2015년 회칙 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사용할 주체로 오랜 시간 여기던 종교의 생각들은 자연을 항상 타자로 여기게 만들었다. 타자 가운데도 무척이나 무력하게 사람의 사용을 기다리는 그러한 타자다. 그렇기에 종교적 자연의 무리한 사용과 파괴는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되지 못했고, 감성적으로 아파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환경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매우.. 2020. 11. 22.
2. 불교의 시작 (2020.03.17)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 유대칠의 불교 이야기 2. 불교의 시작 절망 가득한 곳에 희망에 대한 간절함은 더 강해진다. 희망에 대한 강한 간절함은 그저 관념의 조각이 아닌 현실의 희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시대를 변화시킨다. 불교도 그렇다. 그렇게 등장했다. 산 속으로 도망가 현실을 버린 이들이 아니다. 현실의 그 지독한 부조리의 아픔에 새로운 형태의 분노가 일어난 것이다. 나의 불교는 도피가 아닌 분노에서 시작한다. 그 분노는 무엇을 가지려는 분노도, 무엇이 되어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분노도 아니다.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노, 아집이 만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신과의 싸움, 그런 분노다. 기원전 5세기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는 불교의 바퀴를 돌렸다. 그 시대의 .. 2020. 3. 17.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유대칠의 불교 이야기 - 1. 불교가 등장하기 전 (2020.03.11)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 유대칠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등장하기 전 불교(佛敎)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내가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지금은 없어진 대구 수성 1가의 어느 작은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샀다. 바로 『금강경(金剛經)』이다. 지금 생각하면 뭐 하나 제대로 이해한 것 없지만, 야간자율 학습 시간,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책의 내용을 돌아보면서 한참 명상에 잠긴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더 궁금하기도 하고, 당시 수업 시간에 들은 기억이 나서 도서관에 가서 빌려 읽은 책은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 617-686)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다. 어려운 책이었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은 깨우침에 나름 상당히 흐뭇한 시간을 보냈던 것 .. 2020.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