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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174

철학은 더불어 우는 목소리에 대한 기록이어야 한다. (더불어 철학 시작하기 5) 철학은 글공부가 전부인가? 조선 시대 지식인을 생각해보자. 그들 대부분은 글공부가 너무나 소중했다. 공자니 주자니... 이황이니 이이니... 그들의 삶 내내 그들의 이름은 단순한 누군가의 이름이 아닌 답의 이름이었고 그 답 가운데 누구의 답을 선택하면 그 답을 더욱더 단단히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이 매우 순수한 것이라도 사실 조선 지식인들이 그들과 동시를 산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한 일은 매우 적다. 아무리 몇몇 학자들이 신분제의 문제점을 인식했다 해도 사실 그런 인식이 사회를 개혁하자는 분노가 되진 못하고 그냥 인식으로 그쳤다. 왜일까? 솔직하게 생각해 보면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은 그 시대 자신이 인식한 그 사회적 문제에서 고난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통치의 주체일 뿐이었다. 종종 양반들.. 2021. 6. 5.
큰 착각 (더불어 철학 시작하기 1) 큰 착각 ‘철학(哲學, philosophia)’은 삶을 바꾸지 못한다. 철학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삶은 바뀌지 않는다. 사회적 혼란은 철학 지식의 부재로 일어나지 않는다. 철학을 아무리 많이 가르치고 아무리 많이 주입해도 사회적 혼란은 해결되지 않는다. 철학이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고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란 생각은 하지 말자. 그러지 못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철학이든 신학이든 그 지식이 우리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종종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부조리들이 ‘철학의 부재(不在)’ 때문이라 생각한다. 틀린 말이다. 사회적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리 많은 철학적 지식을 가르치고 주입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철학책이 아무리 많이 번역되고 연구되고 논문이 수없이 생산되어도 이 사회의 부조리를 .. 2021. 4. 27.
'나'는 '너'를 통해 진정한 '나'가 된다. (<대한민국철학사> 읽기) "'나'는 '너'를 통해 우리가 됨으로 '진정한 나'가 된다. 너는 나에게 철학적 구원의 길이며, 철학의 신이 내민 손이다. 나 역시 너에게 그러한 존재다. 그렇기에 너를 비우는 홀로 있는 나의 자기반성이 참된 나를 이루지 못한다. 참된 철학적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 우리 가운데 너를 만나야 한다. 꼭!" ( 40-41쪽) 너를 통하여 나는 온전한 나로 있게 된다. 너 없이 나 홀로 온전한 나로 있지 못한다. 나는 너로 인하여 너와 더불어 나로 있게 된다. 그러니 너는 온전한 나를 향한 문이며, 온전한 나를 향한 구원의 시작이고 그 구원을 향하여 신이 내민 손이다. 그저 있을 수 있다. 너 없어도 생물학적으로 그냥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저 살아있는 것이 나에게 뜻을 품지 않는다. 뜻을 품고 나.. 2021. 4. 24.
4.19다. 더불어 하나 되어 분노하자. 우리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가 되자. 4.19다. 결국 부조리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역사를 만든다. 누군가의 지휘가 아닌 민중의 분노가 터져 나올 때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 되어 분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분노는 작게 작게 쪼개 버리는 것이다. 자신들의 힘보다 작게 말이다. 그렇게 작게 작게 쪼개어진 분노, 서로 다른 생각이라도 그 부조리를 향하여 소리치며 손을 잡지 못하는 분노는 저 큰 힘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그 큰 힘은 지금도 이 땅 민중의 분노가 하나로 크게 되지 않게 쪼개고 쪼갠다. 정치인이지 지식인이니 다 그 이름으로 주체가 되어선 안 된다. 그 이름으로 주체가 되면 그 자리에 민중은 없다. 그들에게 의지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의지하면 그들 자신만이 답이라 생각한다... 2021.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