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존재론94 지금 우리에게 철학은 쓸모있는가? 철학이 어디에 쓸모가 있었을까? 철학은 물리학이나 화학 혹은 생물학 등을 열심히 연구한 이후에 한 학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학이나 법학 등을 열심히 연구한 이후에 익히게 된 학문인가? 사실 철학은 대학에 있지 않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는 기초학의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18세기와 19세기 형이상학이란 교과를 보면 책의 가장 앞에 간단하게 형이상학이나 철학을 정의하고 이후 엄청나게 간단하게 철학사를 정리한다. 너무 간결한 정리라서 그것을 철학사라고 부르지도 민망하다. 이후 존재론에서 있는 것 일반을 다룬다. 이어서 우주론, 철학적 심리학, 철학적 신학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있는 것을 다루었다. 존재론은 철학적 신학을 익히기 위한 기초학이었다. 그리고 철학이 다른 학문에 대하여 그와 같았다... 2020. 7. 11. '울고 있음'의 터에서 철학은 어렵다. 사실 우리말로 되어 있어도 어렵다. 당연하다. 독일 사람에게 독일 철학이 어렵고, 프랑스 사람에게도 프랑스 철학은 어렵다. 단지 어럽지만 그 철학을 부여잡는 것이 그 공간에서의 부조리에 대한 치열함 혹은 합리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살고 있는 그 곳의 고난의 참 의미를 궁리하고자 힘들지만 읽어간다. 그 고난의 참 의미, 그 뜻이 누군가에겐 진보적이고 누군가에게 보수적이라도 그렇게 읽어간다. 참 뜻을 알아내기 위해 말이다. 적당히 현실의 문제에 고개 돌리고 신비 속에 숨어 낱말 자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더 형이상학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언어 유희로의 장난감일 뿐이다. 참 철학이라면 고난에 고개 돌리지 못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당한 고난이 그 고난의 전부라는 아집을 버려야 .. 2020. 7. 9. 가장 가까운 먼곳 민족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힘이 때론 희망이지만 때론 폭력 가득한 절망이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힘이 때론 희망이지만 떄론 폭력 가득한 절망이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힘이 때론 희망이지만 때론 폭력 가득한 절망이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힘이 때론 희망이지만 때론 폭력 가득한 절망이었다. 더불어 살기 위해 죽자가 아니라 너 죽어 나 살자! 외치는 이기적 외침의 듣기 좋은 말, 듣기 좋은 거짓, 결국 그것이었다. 민족이란 이름이지만 그 민족은 몇몇이었고, 그 몇몇이 그들만 누리고 살았다. 국가라는 이름이지만 그 국가는 몇몇이었고, 그 몇몇이 그들만 누리고 살았다. 종교라는 이름이지만 그 종교는 몇몇이었고, 그 몇몇이 그들만 누리고 살았다. 가족이란 이름이지만 그 가족은 몇몇이었고,.. 2020. 7. 8. 그냥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나의 앞에 놓인 돌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는다. 스스로 돌로 존재하고 있다. 돌로 존재하는 자기 정체성의 운동을 하고 있다. 조금 딱딱한 이야기지만, 사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다. 그 본질의 충실함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좁혀져 있지도 않는다. 그 돌은 나에게 말을 건내기도 한다. 내 딸은 울산의 바다에서 주워온 돌을 나에게 선물했다. 딸에게 이 돌은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문진’이었다. 넘어가는 공책와 책을 잡아주는 무거운 돌은 딸에게 그렇게 쓸모있는 벗이었다. 바닷가에 그렇게 수백년 있었을 그 돌은 다시 나의 방에 들어와 나의 옆에서 문진으로 있다. 돌은 딱딱하고 무거운 본질의 구현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홀로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마주하는 누군가의 앞에서 말이다.. 2020. 7. 7.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