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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94

존재론 강의1 (2020.05.18) 영어로 be 동사는 '있다'의 의미를 가지지만 동시에 '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둘이 하나의 단어 속에 녹아들어가있다. 그리고 품사도 동사다. 그러나 한국말은 그렇지 않다. '있다'는 실존의 여부에 대한 형용사이고, '이다'는 서술격 조사다. 이 둘을 하나의 단어로 묶어 낼 수 없다. 한국말이 그렇다. 지중해 사람들이 그 be 동사와 관련된 고민을 두고 ontology라고 한다. 우리는 이를 존재론이라 옮겨 읽는다 .그러나 존재라는 말은 실존만을 의미하지 지중해 사람들의 말 처럼 '이다'와 '있다'를 모두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어말으로 생각하면 한국어는 지중해 연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사유를 언어적으로 온전히 그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다. 한국말 어디에서 있다와 이다가 하나의 단어로 묶여있지.. 2020. 5. 18.
노동으로 나는 있고 무엇이 된다. 2020.03.25 나에게 연구... 책과 논문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노동이다. 노동자로 나의 노동이다. 내가 굳이 나를 철학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는 것은 노동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나의 노동은 나의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과의 대화다. 농부에게 농사는 노동이다. 그 노동으로 그는 생존의 문제, 자기 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동시에 그 노동 생산물로 세상과 대화한다. 그 대화 가운데 농부는 그냥 말뿐인 무엇이 정말 유의미한 뜻을 가진 무엇이 되어 우리 가운데 참여하게 된다. 노동은 그렇게 나를 있게 하고 나를 무엇을 우리 가운데 있게 하는 존재론적 행위다. 나는 바로 그 존재론적 행위를 하는 사람이고, 노동의 권리는 바로 그 존재론적 행위의 권리다. 소중한 권리다. 그 만큼 간절하다. .. 2020. 3. 25.
지금 여기는 '절망의 터'가 아니라, 내 '희망의 터'다. (<대한민국철학사> 한줄 읽기) 함석헌 철학의 시작은 ‘지금 여기의 긍정’이다. 삶의 긍정이고 역사의 긍정이다. 바로 여기 무엇인가 끝없이 부족한 결핍의 공간에 대한 긍정이다. 함석헌은 외적 초월이 결국은 민중을 무시하는 데로 이어질 것임을 알았다. 359쪽 지금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항상 더 많은 것을 보면서 무엇이 더 없는지 지적 당하는 삶을 살았다. 과거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을 해결해야하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버려졌습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항상 누군가의 입만 보고 살았다. 지적 하는 입, 너는 이렇게 부족하다는 입, 너는 온통 부족하다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모역하는 입, 그 입만 보고 살았다. 그 입에서 나온 것을 답이라 생각하면 삶은 조금 편했다. 그래서 그 입이 답이 .. 2020. 3. 14.
'너의 아픔'은 '우리 있음의 터'다. '만남의 터'다. (대한민국철학사 한 줄 읽기) 철학의 자리는 고난의 자리다. 철학은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자기 무시’ 가 민중을 침묵하게 하는 힘이 있다면, 철학은 자기 소리를 내게 한다. 368쪽 사악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마스크가 아니라, 방탄조끼를 입고 무장을 하며 살아도 불안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무시와 조롱을 받았지만 또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한 고마움 또한 너무나 많았다. 나란 존재는 어쩌면 그 고마움의 순간이란 조각들이 이른 그 무엇일지 모른다. 나의 존재 자체가 이미 너를 불러 있고 우리 속에서 있을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이란 말이다. 그러나 사악한 이들도 있다. 이 와중에도 돈 욕심에 타인의 불안이나 아픔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이 불안을 무지하고 무식한 이의 어리석음 정도.. 2020.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