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불어존재론174

불행하여라! 욕심에 사로잡힌 이들이여!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읽기) 불행하여라! 욕심에 사로잡힌 이들이여! -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의 것입니다.” (요한 코리소스토무스, 2,6) 교부들에게 ‘소유’와 ‘공유’는 매우 주요한 고민거리입니다. ‘소유’란 ‘나의 것’이 기본이고, ‘공유’란 ‘우리의 것’이라 말입니다. 소유 중심의 세상에선 나의 것 중심입니다. 나의 것이 더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소리를 치게 됩니다. 행복의 기준도 소유물의 크기입니다. 소유물의 크기가 큰 사람은 무엇인가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더 받은 사람.. 2020. 1. 17.
초월이란 것... 초월이란 종종 밖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밖에 있는 것이 초월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냥 밖이 아니라 자기 가운데 모든 것을 밖으로 부터 품는 것도 초월이다. 그냥 밖은 남이지만 초월은 그런 남도 아니다.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을 나의 밖에서 부터 품으면 내 안까지 오롯이 품는 것이 초월이다. 그래서 그냥 밖이 아니다. 그러나 밖이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모든 것은 있는 모든 것을 품는다. 있는 건 밖과 안을 모조리 품는다. 그 품의 밖은 없다. 단지 몰랐을 뿐이다. 유대칠 씀 2020 01 14 2020. 1. 14.
아니 계신 듯 계신 하느님 몇몇 사제와 목사의 악행을 두고 하느님의 부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렇게 없이 계신 하느님은 그 없이 있는 듯 보이는 시간 속 우리 자신이 하느님 계심의 증거가 되라는 것으로 듣는다. 거대한 몸짓의 힘이 없다면 자기 삶 속 작은 몸짓도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아니 계신듯 계신 하느님은 우리의 행함으로 계신 하느님, 그렇게 하나된 뜻 속에 모두가 하나됨으로 있게 하는 분이라 믿는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2020 01 12 2020. 1. 12.
형이상학에 대한 고민 1 (일간유대칠 3호 2020년 1월 12일) 연재: 형이상학에 대한 고민 1과연 제1철학 혹은 있는 것으로 있는 것에 대한 연구 혹은 지혜 혹은 신학이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고 진술되는 이것은 무엇인가? 아마 눈치 빠른 이라면 이 답을 알 것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무엇에 대한 학문인가? 처음부터 학문으로 의도되긴 할 것인가? 형이상학은 있는 것으로 있는 것에 대한 있음에 대한 학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신에 대한 학문인가? 12권의 시작을 보자. "우리의 이론은 실체에 대한 것이다. 지금 연구되는 것은 실체들의 원리들과 원인들인 까닭이다.(Meta.XII,c.1,1069a18)" 12권을 보면 형이상학은 실체에 대한 학문이다. 그리고 실체의 원리와 원인을 연구한다. 그 연구의 목적은 결국 실체를 다루기 위함이다. .. 2020.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