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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174

나도 모를 아픔 앞에서... 요즘...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죽음을 전해듣는다. 벗의 아버지... 아내의 고모... 또 벗의 아버지... 벗의 남편... 그 많은 이별의 아픔이 지나간다. 처음엔 그저 일상 속 작은 슬픔이었다. 그러나 이제보니 작은 슬픔이 아니라 참고 있던거다. 난 그 순간 아팠고 때론 깊이 깊이 아팠지만 그냥 넘기고 넘겼다. 글노동한다고 집안일한다고 이런저런 주변일들 해결한다고... 오늘 길거리 말라죽은 식물을 마주하는데... 이후 갑자기 너무 슬프다. 정말 한없이 슬프다. 그래도 나는 강의 준비를 해야하고 강의를 가야하고 또 강의를 한다. 준비한 10개 중 예상하지 못한 내용과 무관한 어느 질문에 조금 흩어지더니 5개는 풀지 못했다. 더 우울해졌다.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잔을 한다. 아내는 무슨 일인지 묻는다... 2019. 12. 14.
아픔 철학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다. 인간이 경험한 고통의 숫자만큼이나 철학의 고민도 다양했다. 우리 사회에 철학 무용론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철학이 더 이상 우리의 고통에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철학이 철학으로 있는 그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포기해 버려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철학은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 유대칠 2019. 12. 12.
더불어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성전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할 때, 치쁘리아누스(Cyprisnus, 200/210?-258)는 converso(꼰베르쏘)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동사는 그냥 '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아닙니다. 같이 더불어 산다는 의미입니다. '벗'으로 더불어 살고 '부부'로 더불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홀로 가다가 더불어 돌아와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치쁘리아누스는 하느님의 성전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 할 때, 그냥 '홀로 살다'가 아닌 '더불어 살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느님은 단지 나만의 '나'의 하느님이 오직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리 모두의 하느님, 하나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원래 모습이라 치쁘리아누스는 말합니.. 2019. 12. 10.
나만 아프다... "다만 그의 몸은 자기의 아픔만을 느끼고 그의 영은 자신만을 애통해합니다." 욥기14장22절 그 많은 고마움은 보이지않고 그저 나만 아프다 생각한다. 그 아픔에만 집중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앞에 당장 누구 찾아와 죽음의 고통을 당하지만 보이지않는다. 결국 나도 그도 모두 홀로 외로운 신앙을 이어간다. 경우에따라서 이기적인 신앙이 되기도 한다. 우리로 함께 있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기도 한다. 각자 각자 그렇게 저마다 자기 아픔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한다. 눈을 떠 내 앞 아픔에 다가가자. 다른 이유없다. 그냥 더불어 안아주자. 그가 홀로 아프지 않게 우리됨을 보여주자. 그때, 나도 이 홀로된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곳에 하느님 역시 더불어 있으시리라 믿는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 2019.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