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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174

기도하는 이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이나 청원함에 있어 절제하고 조용하고 ‘부끄러움(pudorem)’이 있어야 합니다. 치쁘리아누스의 에 나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이나 청원함에 있어 절제있고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조금 의미를 좁혀서 신앙이란 것을 가진 이들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느님'에게 기도한다지만, '우리'라는 말이 참 어색하게 이기적 기도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의 행복과 나의 소유와 나의 권력과 나의 높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심지어 조금 높은 자리에 오르고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조금 더 많은 권력을 가지면 그것을 가지고 '나'를 도운 하느님이라며 자랑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부유함은 누군가의 아픔을 조건으로 가능한 세상입니다.. 2019. 11. 23.
철학사습작20191117 철학사는 전문적인 개념의 역사라기보다 시대에 던져진 물음에 응답하는 구조속 다양한 응답사이의 관계에 대한 풍경화다.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는 그 풍경으로 부터 떨어진 존재가 된다. 풍경화 속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 풍경화라는 그림이 존재하는 토대다. 객관적 사실로 보이지만 철학사가라는 주관에 의해 만들어진 풍경화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주관적인 그림이다. 그 그림에 그려진 것은 낱개의 개념들이 아닌 그 철학사가의 눈에 잡힌 그 시대 물음에 대한 다양한 응답과 그 응답 사이의 다양한 관계다. 철학사가에게 그 시대의 물음이 보인것은 그의 주관속 철학적 물음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여전히 현재형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사는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과거도 지금도 있지 않과 철학사가라는 선험적 주.. 2019. 11. 17.
철학... 철학이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 없어도 그냥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다 생각한다. 그럴수있지만 문제는 그게 철학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전문가의 것이 아닌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철학도 배워 익혀야한다. 그리고 자기 길을 다져가야한다. 철학은 아무런 지식없이도 할 수 있는 망상이나 사고놀이가 아니다. 철학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2019. 11. 14.
지독한 아픔은 지금도 그대로다. 그래서 지금도 희망을 품는다. "나봇 이야기는 옛날 일이죠. 그러나 지금도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날마다 다른 이의 것을 탐하지 않는 부자가 어디 있습니까? " (암브로시오, 1장1) 아프지만 사실이다. 친일파는 그때에만 있었나. 지금 친일파는 이름을 다르게 할 뿐 여전이 존재한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고, 고려 시대에도 그러했다. 지구 곳곳에서 언제가 일어난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절망의 이야기인가? 어쩌면 절망을 그저 운명이나 원래 세상은 그러한 것이니 생각하고 그 절망을 자신의 일상으로 쉽게 받아드리는 것은 아닌가? 절망의 공간은 희망의 공간이다. 절망의 공간에서 그 절망을 벗어날 희망을 품는다. 절망은 희망의 터다. 전태일은 보자. 그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그토록 힘든 가운데 자신의 가진 작은 것도 나누는 그 사랑은 무.. 2019.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