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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174

성찰 2019.11.30 성찰 2 2019.11.30 성탄의 기쁨이 우리 가운데 더불어 행복한 희망의 기쁨이라기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가 권하는 소비의 기쁨이 된지 제법 오래다. 아니 제대로 아름다운 성탄을 기억하고 산 적은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는 스스로 이땅에 와 스스로 기꺼이 고난 속에 힘들게 살다 아픔 속에 돌아갔다. 스스로 그러했다. 사랑하니 말이다. 사랑은 스스로 충분히 달리 살수있지만 정말 사랑해서 어쩔수없이 누군가의 아픔으로 다가가는 일종의 자기 포기다. 기꺼이 아파하고 기꺼이 품는다. 기꺼이 나만 생각하지 않는다. 너로 인해 아픈 내가 너 없이 있는 나보다 더 마땅이 있어야할 나라며 그리 아프게 사는 것이 사랑이라며 기꺼이 그리 산다. 성탄은 그 아픈 사랑이 우리에게 눈에 보이게 다가온 사건을 기억함에서 시작한다... 2019. 11. 30.
성찰 2019.11.29 (Meditationes de ente in nobis) 우리 가운데 있음에 대한 성찰 Mditationesde ente in nobis 2019년 11월 29일 성찰 사람들을 떠나 아무도 없는 산 높은 곳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던 이들 가운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 어찌 보면 신의 잔인한 절대적 침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초월적인 하느님의 지혜라면, 우리 밖 우리에게 남으로 있는 하느님의 지혜라면 과연 우리 삶의 참다운 지혜가 될까요?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 밖이 아닌 우리 안에 내적 초월성으로 나와 너를 우리라는 하나의 있음으로 묶어주는 신앙의 핏줄과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밖에 가서 하느님의 지혜를 구한다면, 어쩌면 그 우리 밖 하느님의 지혜는 참다운 하느님의 지혜가 아닌 허상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아픔을 모르는 지혜.. 2019. 11. 29.
어리석은 사람이란... (헤라클레이토스 읽기 2019 11 27) "어리석은 이는 어떤 말에도 쉽게 흥분한다." DK22B87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말에도 쉽게 흥분한다. 그런것 같다. 여기에서 말이라 번역된 헬라어는 logos다. 뭐, 이 말은 논리나 생각으로 읽으면, "어리석은 이는 어떤 생각에도 쉽게 흥분한다"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들으면 나와 '다름'이 우선 보인다. 그 '다름'이 '그'를 '그'로 있게 하고 '나'를 '나'로 있게 하지만, 이상하게 그 다름이 싫다. 나와 다른 그는 왠지 나에게 남이라거나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서일까? 나의 힘이 흔들지 않은 어떤 영역의 확인이라서일까? 나의 끝은 남이다. 더 정확하게 내 생각은 남의 생각이다. 경계다. 그 경계, 그 다름이 싫다면 내가 그의 생각으로 채워지거나 내가 그의 생각을 채우거나 해야 한다... 2019. 11. 27.
국산외국인이 되지말자! 勿爲國産外國人 김익진 선생님에 대한 글을 읽으며 마주한 말입니다. 국산 외국인이 되지말자는 말이지요. 국산 외국인. 이 땅에서 이 땅의 사람으로 고민하지 못하고 남의 답으로 그것이 더 우월하다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국산 외국인이겠지요. 조선은 중국의 답이 정답이라며 그 답을 부여 잡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 답을 이리 해석하고 저리 해석 하면서 말이죠. 우리는 우리가 중심이 되어 사고 했던 적이 얼마나 될까요. 이젠 안된다는 마음, 어차피 우리는 남의 변두리에서 남을 그리워하며 살아야하고 나란 존재도 그 정도일뿐이라 생각한다면 어차피 남의 변두리에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면 우리 철학이란 것도 남의 답을 달달 암기하고 요약정리하는 것 뿐이겠지요. 지금 처럼 말입니다. 자기 철학없는 철학노동자들 가득하며 그저 .. 2019.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