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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463

너와 더불어 있을 때 나에게 양심이 찾아온다. (대한민국철학사 읽기) "나다운 '나'로 있을 수 있는 터가 '우리'라는 전체 안이다. 양심도 홀로 있는 나에게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전체 가운데 '너'와 더불어 있는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판단의 주체는 홀로 있는 '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라는 전체 가운데 주어진 것이다." ( 25쪽) 더불어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말이다. 나를 돌아보면 나는 항상 너들과 더불어 있었다. 나만이 홀로 있던 시간보다 나의 소중한 순간들이 나는 항상 너들과 더불어 우리 가운데 있었다. 맞다. 쓰디쓴 이별의 아픔 속에서 너는 나에게 나를 버린 연인이었고 사랑의 기쁨 속에서 너는 나에게 소중한 연인이었다. 네가 무엇으로 나에게 다가오든 나는 너와 더불어 우리를 이루며 그 우리 가운데 나로 살았다. 우리라는 전체 .. 2021. 4. 21.
설령 개똥철학이라 불려도 내가 주체가 된 내 고난의 철학이 더 좋다. (대한민국철학사 읽기) "가진 자, 고난을 모르는 자의 경험이 아니라 없는 자, 고난 중 부재를 경험한 자의 철학이어야 한다." ( 225쪽) 이런저런 유명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안다고 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나의 삶은 또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지금 여기 나에게 찾아온 고난의 옆에 더불어 있지 않은 철학이라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나에게 무슨 '뜻'을 이루겠는가? 철학의 주체가 고난의 주체일 때 그 철학은 고난 속에서 울고 분노하며 무엇인가를 토해낸다. 고상한 대화의 수단이나 지적 허영의 수단이 아닌 자기 삶의 치열함 속에서 나온 철학으로 다가온다. 바로 그것이 나에게 뜻으로 다가오는 철학일 것이다. 유명 철학자의 그럴듯한 이름보다 더 소중하고 뜻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철학이다. 개똥철학이라 불려도 상관없다. 철학.. 2021. 4. 20.
4.19다. 더불어 하나 되어 분노하자. 우리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가 되자. 4.19다. 결국 부조리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역사를 만든다. 누군가의 지휘가 아닌 민중의 분노가 터져 나올 때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 되어 분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분노는 작게 작게 쪼개 버리는 것이다. 자신들의 힘보다 작게 말이다. 그렇게 작게 작게 쪼개어진 분노, 서로 다른 생각이라도 그 부조리를 향하여 소리치며 손을 잡지 못하는 분노는 저 큰 힘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그 큰 힘은 지금도 이 땅 민중의 분노가 하나로 크게 되지 않게 쪼개고 쪼갠다. 정치인이지 지식인이니 다 그 이름으로 주체가 되어선 안 된다. 그 이름으로 주체가 되면 그 자리에 민중은 없다. 그들에게 의지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의지하면 그들 자신만이 답이라 생각한다... 2021. 4. 19.
더불어 좋음의 길을 가고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신학으로 읽는 성서3) "그러면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것이고, 악을 저지른 이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5장 29절) 선을 행한 이들은 좋음을 행한 이들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말은 좋음 것과 선한 것이 같습니다. 라틴어 말 성경에도 이 구절은 좋음을 행한 이들이라 되어 있습니다. 헬라말로 된 원문 신약 성서에도 좋음을 행한 이들이라 번역할 수 있는 말로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의 말에는 좋음과 선함은 다릅니다. 좋음이 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음이 선할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무엇일까요? 나만 좋으면 나쁨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나만 좋으려 살면 나쁜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남이 나로 인하여 아프고 힘들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더불어 모두가 좋으면 그 좋.. 2021.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