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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463

있어야 할 곳에 둡시다. (더불어 신학과 복음 읽기1)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지 마시오. 거기서는 좀과 벌레가 갉아먹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갑니다. ( 6장 19절) 이후 예수께서는 이어서 어찌 살아야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제가 묵상한 바로 이 구절입니다. 이 부분은 대체로 흔히 Q문헌, 즉 예수 어록이라 불리는 곳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직접 전한 말씀이 분명하다는 것이겠지요. 암브로시오의 에서 암브로시오는 이 세상에 쌓은 재물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는지 화를 내며 전해줍니다. 그 분노는 근거 없는 분노가 아닙니다. 바로 이 구절, 예수의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한 분노입니다. '공유'라는 말이 유행하며 영어 common에 대한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라틴어 commūnis에서 .. 2020. 11. 20.
전체를 향한 쉼없는 부서짐, 종교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하지 않을까?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 계단이다. 전당을 굉장하게 짓는 것은 종교가 먹을 것을 다 먹고 죽는 누에 모양으로 제 감옥을 쌓음이요, 제 묘혈을 팜이다.” (함석헌, , 사상계 1956. 1월 30호) 항상 우리는 최선이라 말합니다. 이런저런 비판을 들으면 지금은 이런저런 대안들이 있어서 문제없다 합니다. 그러나 1956년 함석헌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과연 이 생각에 무엇이라 답할까요? 결국 종교는 자기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끼리 우리 편이 되어 그 속에서만 살다 보면 우리 편의 밖은 보이지 않습니다. 밖을 모르는 안은 썩기 마련입니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 2020. 11. 19.
전태일을 부른다는 것 (전태일과 함석헌 그리고 문익환) "그 참한 혼을 살려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전태일을 추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그에게 추도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불사른 사람에게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그보다도 차라리 우리가 그를 살려내야 한다고 하고 싶다. 전태일을 살려라. 그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 우리가 그를 차마 죽은 채로 둘 수가 없다. 아니다. 전태일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다. 그는 그 죽음으로 우리 앞에 삶을 절규하고 있다. 그런 그를 어찌 차마 죽음 속에 묻어두고 썩혀둘 수가 있느냐? 전태일을 살려야 한다. 왜 우리는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되나? 첫째, 그는 이 썩어지고 악독한 사회에서 참 드물게 보는 아까운 심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 2020. 11. 18.
결국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학으로 신학을 생각하며...)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요한 4장 8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장 19절) 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합니다. 신은 어떤 존재이고 그 신을 향한 우리의 구원은 어떠한 것인지 참으로 길고 긴 시간 참으로 다양한 논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가지고 서로 다투고 어느 순간엔 서로를 이단이라며 비난하며 그렇게 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토대로 서로 다툽니다. 그런데 막상 속 그 신은 사랑이라 참으로 간단하게 정의되어 나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항상 사랑하고 있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던 그때에서 그분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2020. 11. 18.